#77 – 파티션에 대한 기억과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첫 장면, 에른스트 크라머의 시인의 정원 – 에 이미 피라미드가 등장했었다. 풍경화식 정원의 퓌클러 공의 묘도 피라미드 모양으로 축조되었다. 그럼에도 여태 피라미드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해왔다. 피라미드 얘기를 시작하면 이집트로 귀결될 것이므로 이집트 순서가 오면 그 때 이야기할 예정이었다. 사실 피라미드에 얽힌 그 많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갈지도 난감했다. 피라미드와의 씨름은 피하고 싶은 쓴 잔이었다.

로마 시내에 생뚱맞게 피라미드가 서 있다. 무척 모던해 보이지만 기원전 12년경에 세운 것이라고. © jeonghi.go

이제 100 장면이 이집트에 도착했다. 지난 달에 이집트 벽화에 나타난 내세의 정원을 다루었으므로 이제 피라미드의 차례가 온 것이다. 정작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정원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었다. 정원에서 피라미드가 큰 이슈가 된 것은 후세들이 한 일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뒤 고대 로마에 이집트 바람이 불었다. 원로들이 로마에 피라미드를 세우고 오벨리스크를 퍼다 날랐다.

그러다 중세가 왔고 천 년을 오로지 십자가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으므로 이집트는 안중에도 없는 시절이 오래 지속되었다. 당연히 피라미드도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사라졌다.

중세가 끝나고 마침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고대를 재발견하면서 그와 함께 이집트와 피라미드 붐이 다시 일어났다. 바로크를 지나 풍경화 정원의 시대가 되면서 이때 이집트 열병이 제대로 도졌다. 피라미드에 대한 인류의 열정은 좀처럼 식지 않는 것 같다. 20세기에 들어서도.

20세기 후반, 아이 엠 페이 또는 이오 밍 페이I. M. PEI (1917 ~ )라는 건축가가 루브르 박물관 앞 광장 한 복판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웠다.

2006년 파리에 갔을 때 루브르 피라미드의 야경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와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 문외한이 무슨 재주로 야경을 찍겠다고 덤볐는지 모르겠다. 사진촬영은 실패했지만 실물로 본 유리 피라미드는 참으로 경이로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러므로 루브르의 피라미드가 한 장면을 차지해야 한다는 계획은 일찌감치 세워두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 것인가. 일단 유리 피라미드가 세워지게 된 경위가 궁금했다. 위키백과 등에 많은 이야기가 써 있으나 흡족치 않다. 2009년 유리피라미드 건설 20주년을 맞아 Philipp Jodidio라는 인물이 책을 하나 낸 것이 있다. I. M. Pei, La Pyramide du Louvre/The Louvre Pyramid 라는 제목으로 불어와 영어로 된 책이었다. 아마존에 검색해 보니 중고책을 저렴하게 팔기에 바로 주문했다.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사진첩이었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내용은 대략 들어있었다. 간접적으로나마 실물을 다시 보기 위해 영화 다 빈치 코드도 다시 보았다. 마음같아서는 파리로 후딱 날아가고 싶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우선 유리피라미드가 탄생하는 데 미테랑 대통령의 힘이 크게 작용했음을 확인했다. 책을 읽는 사이 이오 밍 페이가 이름 석자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게 중요한 순간이다. 이오 밍 페이는 대체 누구인가. 누구이길래 미테랑 대통령이 그리 감싸고 돌았을까? 어떻게 해서 피라미드를 세울 아이디어가 나왔을까.

인간이 파악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얘기를 쓸 수 없는 것이 나의 영원한 문제다. 지금까지 페이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접시 물보다도 얕았다.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뉴욕에서 큰 건축설계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과, 파리의 유리 피라미드, 베를린의 국립역사박물관 신관을 디자인했다는 사실 등에 그쳤었다. 물론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건축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궁금증이 별로 없었다. 그가 중국계라서 그런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20년 전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파티션의 기억


20년 전 뉴욕에 갔을 때 그의 설계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온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그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내가 뉴욕에 간다니까 그 친구가 페이의 설계회사를 한 번 찾아가라고 전화번호를 주었다. 물론 페이는 만나지 못했지만 다른 직원들이 친절하게 사무실을 안내해 주었었다. 그 때 나는 미국식 대형 사무실과 파티션이라 불리는 칸막이를 처음 보았다. 독일에는 대형사무실도 없고 파티션도 없다. 처음 본 파티션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으로 다가왔다. 양계장이나 사육장을 연상시켰다. 여기서 어떻게 설계를 한다는 건지.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다가 칸막이에 걸려 다시 들어갈 것 같았다. 심적 저항감이 너무 커서 페이 설계사무실에 대해 별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 기억 때문에 페이에 대한 글이 써지지 않았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인명사전이나 위키백과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모조리 읽었다. 모두 판에 박혀있는데다가 서로서로 베낀 것이 되어서 그의 인물이 파악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전기를 사서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시작되었다. 페이의 작품과 생애를 다룬 전기는 없고 모더니즘 건축가들을 소개하는 서적에 함께 소개된 것이 여러 권 있는 듯 했다. 이리 저리 뒤지던 끝에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1996년, 베를린 역사박물관 신관 건설을 시작하면서 이를 설계한 페이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다. 그 기사를 쓴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유명 영화인 게로 폰 뵘Gero von Boehm이었다. 본래 저널리스트인데 좋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꽤 많이 만들었다. 알고 보니 그가 페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게 독일식이다. 베를린의 역사박물관이 어떤 건가. 그 옛날 하늘같은 프리드리히 쉰켈(1781-1841)이 설계한 것 아닌가. 쉰켈은 베를린 사람들이  거의 신격으로 모시는 건축가다.

페이라는 미국 건축가가 이제 그에 잇대어 신관을 짓는다는데 페이가 대체 누구냐? 까다로운 베를린 시민들이 모두 알고 싶어 했다. 자격이 있는 친구야? 그래서 베를린 시에서 페이 작품집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서둘러 의뢰한 것이다. 유튜브나 비메오 등에는 뜨지도 않는 고급 다큐다. 이걸 얻어 보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면서 그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우선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감각의 제왕>.

뉴욕에 가서 페이를 인터뷰하던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뉴욕 멘하탄에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건축가 페이는 돌과 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강우에도 불구하고 차를 타지 않고 장화를 신고 걸어서 출퇴근했다. 그러나 막상 자기 집 정원의 잔디밭에 물이 차올라 반듯한 사각형의 형태가 사라지는 것에는 괴로워했다. 그의 기하학은 그의 철학이다.” [Gero von Boehm 1996 Der Herr der Sinne, in: Der Spiegel, 29/1996]♁

매우 마음에 드는 대목이었다. 파티션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게로 폰 뵘은 페이가 엄청나게 질문을 해대는 사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단다. 프리드리히 쉰켈이 설계한 구 역사박물관과 베를린은 어떤 관계인가, 동서가 분단되었다가 다시 합친 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가. 젊은이들은 쉰켈을 아는가? 페이는 특히 서로 상반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게로 폰 뵘은 이렇게 물었다.

” 이렇게 시시콜콜 알고 싶어 하는 이 중국인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생존하는 최고의 건축가로 인정받는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

이제 페이의 약력과 이력이 나올 차례다. 요약하면 이렇다: 1917년 중국 광저우에서 엄청나게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하고 화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구풍의 학교에 다니고 영어를 배우고 헐리우드 영화를 보았으며 삼총사와 찰스 디킨스, 성경을 읽었다. 그는 부처와 카우보이, 캐딜락과 공자라는 이중의 삶을 살았다. 양친의 별장에 거대한 정원이 있었다. 거기서 소년 페이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원에는 돌이 많았다. 연못, 계류에 둘러싸인 기암괴석이 신비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물은 돌을 다듬지만 돌은 어떤 형태로 다듬어질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이는 상반되는 에너지를 서로 결합하는 데 대한 메타퍼였다.

페이는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때의 바위를 자주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이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디자인하는 건축의 형태는 주변상황, 즉 물의 흐름에 적응한 결과이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정원을 늘 반복해서 다시 짓고 있다.”

That’s it!

이게 바로 내가 알고 싶어 했던 거였다. 내 기억 속의 파티션이 사라지고 페이에 대해 친근감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와 그의 피라미드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리고 페이는 1917년 생이니 올해 만으로 99세가 되었다. 장수의 비결이 피라미드일까?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도 든다.

  •  페이 건축사 사무소 웹사이트 

2016.01.29

고정희


100장면 비하인드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