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와 정원.

Claude Monet 184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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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모를 쓴 자화상 1885년 작. 개인소장. soruce: wikiart.org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는 평생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위키 아트 갤러리에서 전작을 모아서 보여주는데 모두 1708점이다. 대부분 풍경이나 정원을 그렸으므로 의외로 그의 그림을 통해 당시 정원의 양상을 분석해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모네가 그림을 그렸던 1860년에서 1920년 사이는 정원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영국의 윌리엄 로빈슨 William Robinson이 『야생정원 The Wild Garden』을 발표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거트루드 지킬 Gertrude Jekyll은 어떤 기법을 적용해야 야생화가 정원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론을 개발했던 때였다. 독일의 경우 칼 푀르스터의 야생숙근초 정원이 조성되었고 유럽 전역에 야생숙근초재배원이 들어서는 등 야생화 열풍이 불던 때였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경계로 놓고 본다면 그 전의 모네 정원들은 소위 말하는 빅토리아식 얌전한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네의 첫 부인 카미유가 수도 없이 정원 속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모네가 가꾸었던 정원들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림으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그의 화풍으로 보아 그림 속의 정원들이 사실그대로였으리라 짐작해도 될 것이다.

카미유의 사후에 모네는 들판에 나가 무수한 풀밭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아마도 야생화 정원을 연구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몇 해 후 지베르니에 집을 사서 야생화 정원을 조성했다. 지금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은 정원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순례지가 되었다. 

1866-1867

빅토리아  풍의 얌전한  정원, 흰색, 빨간 색의 제랴늄으로 단정하게 꾸며졌다. 아래 그림 중 1867년 대형작 <정원 속의 여인들>을 파리의 살롱전에 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모네가 살았던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Ville d’Avray의 정원에서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 정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여인 중 한 명은 곧 모네의 첫 아들을 낳게 될 카미유였다. 신화적, 역사적 이야기가 없는, ‘비서사적’ 그림이어서 전시해 줄 수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설명이었다. 붓질이 성의 없다는 평도 곁들였다. 만약에 실존하는 여인들 대신 비너스, 주노, 아테네 등의 세 여신을 그려 넣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역사적 모티브를 선호하던 시대였다. 과거 지향적이던 정원의 흐름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림에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육년 후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시 순간의 장면을 포착했던 모네의 그림이 이해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인상파라는 조롱 섞인 명칭만 남았다.1)고정희, “#18 클로드 모네에게 정원을 묻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해 본 조경사, 환경과 조경 2014.07, p. 132

1870-1879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피해 런던에서 일 년을 보낸 것을 제외하면 모네는 아르장퇴유 [Argenteuil] 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1873년 카미유와 결혼하고 아르장퇴유에 작은 집을 사서 정원을 꾸미며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정원과 가족 특히 아내와 아들의 그림이 많이 탄생했다.

그림에 변화가 왔다. 1871년 런던에서 그린 템즈 강 풍경을 보면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 (1775-1851)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미술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거기서 접한 윌리엄 터너 식 빛과 색의 비밀이 모네의 회화법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할 것이다. 인상파가 탄생하던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조경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그 해에 윌리엄 로빈슨이 <야생정원The Wild Garden>이란 책을 발간했다고 말할 것이다. 모네가 비록 정원서적의 충실한 독자로 소문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로빈슨의 책을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른 한편, 모네 같은 정원 인간이 터너와 로빈슨의 나라에 가서 터너만 가지고 돌아오진 않았을 것 같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이젤을 챙겨들고 정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부터 센 강변의 야생화초원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1879년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한동안 정원을 그리지 않았다. 그 대신 풀밭을 더 부지런히 그렸다. 나중에 다시 정원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정원 속에 늘 등장했던 인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2)위의 글, p. 133

아래의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정원 속의 모습과 정원 밖 야생의 경관이 확연히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야외에 이젤을 들고 나가 앉아 야생의 풍경을 그리며 모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야생의 풍경을 정원으로 끌어들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난 날, 제라늄의 빨간 꽃 위에 내리는 화사한 빛을 보았다면 이제는 야생초원에 내린 빛이 어떻게 색의 마술을 펼쳐내는지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제 그의 가족들은 정원이 아니라 풀밭에 나가 포즈를 취해야 했다. 풀밭에서 책을 읽는 카미유, 양산을 들고 풀밭사이를 거니는 카미유와 장. 그 후 십년 가까이 모네는 무수한 초원풍경을 그렸다. 아마도 초원에 서서 캔버스에 붓질을 하며, 어떻게 해야 저 아름다운 빛과 색을 내 정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3)위와 같음.

1879-1882

베퇴유로 이사. 거기서 아내가 사망한다. 이후 정원 그림이 사라지고 그 대신 풍경이 자리를 차지한다. 1881년에 다시 정원 그림을 시작하나 몇 점 되지 않는다. 아마도 해바라기를 그리기 위해서였을지 모르겠다.

1883-1894

1883년 지베르니로 이사.

만 사십 삼세가 된 모네는 다시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마지막 살던 집의 임대료가 밀려 집을 비워주어야 했던 것이다. 아직 수입이 많지 않았지만 둘째 부인이 여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통에 식구가 폭증했으므로 오히려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센 강변을 따라 내려가며 맞춤한 곳을 찾던 모네는 파리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지베르니라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마을 주변의 경관도 아름다웠지만 그 마을에서 넓고 저렴한 집을 찾아냈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 집은 사과주를 만들던 양조장이었으므로 넓은 사과밭이 딸려있어 정원의 꿈을 이루기에도 좋았다.4)고정희, “#19 마르셀 푸르스트의 예언”, 100 장면으로 재구성해 본 조경사, 환경과 조경 2014.07, p. 134

정원은 거의 꽃으로 채웠다. 양쪽 가장자리에 배치된 잔디밭과 장미원과 유실수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은 “풍성하게 꽃이 피는 파라다이스” 5)Karin Sagner, Monet in Giverny Prestel 1994, p.24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모네 자신은 물론이고 정원사와 조수들을 비롯하여, 온 가족이 달려들어 여러 해를 고생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늘 꽃이 피어있는 정원을 만들고자 70여종의 숙근초도 심었다.

정원이 완성되기까지 모네는 거의 십 년동안 주로 건초더미와 포퓰러, 초원 그림을 그렸다. 정원 조성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직 정원을 그릴 단계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정원이 십중팔구 기대했던 결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원을 버려두고 센 강변을 돌아다니며 건초더미와 풀밭을 수없이 그렸다. 그리고 때가 오자 수련원을 만들었다. 모네가 수련원을 만든 과정이나 수련연작에 집착했던 사실로 미루어보아 주정원이 그림의 대상으로 부적절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는 부족한 것을 상상으로 때우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상이 완벽해야 진실한 그림이 나온다고 생각했다.6)고정희, 위의 글

1895-1899

지베르니의 수련원이 완성되었는지 1895년 일본 풍의 목교 첫 그림 탄생.

지베르니로 이사 온 지 꼭 십년 만에 기찻길 너머에 땅을 조금 사서 수련원을 만들었다. 이 땅은 수목군락과 덤불로 뒤덮여있었고 센 강의 지류의 일부가 흘러들어 작은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천상 정원감이었다. 모네는 여러 해에 걸쳐 경관을 다듬어 수련정원을 완성시켰다. 진기한 수련을 사서 둥근 형태로 배치하고, 일본풍의 다리를 놓고 다리 주변에 등나무를 심었으며 물가에는 아이리스를 가득 심었다. 수련원에 대한 모네의 집착은 대단했다. 숙근초원이 실망스러워 더욱 그랬을 것이다.

1895년에 그린 정원 그림 한 점과 국화꽃만을 그린 그림들이 몇 점 전해진다.

수련원이 완성된 후부터 매일 수련을 그렸는데 연못의 물이 수정처럼 맑기를 원했다. 물에 비치는 하늘과 구름, 그림자와 경관의 영상이 아무 흠 없이 완벽해야 했다. 담당 정원사를 따로 두어 매일 아침 모네가 그림을 그리러 나오면 완벽한 수면과 만날 수 있도록 관리시켰다. 7)위의 글

  • 1897-1899년 수련 연작 완성
  • 1899: 일본 풍 목교 연작

1900-1910

이후 모네의 작품 세계는 수련에 집중되어 갔다.

물론 정원도 몇 번 그렸지만 하나같이 한 밤중에 그린 것처럼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모네의 그림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정도로 침침하며 같은 시기에 그린 수련연작의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1909-1912 사이에 닥친 백내장의 영향이었다는 해석도 있으나 백내장을 앓기 전, 1903년 이미 매우 어두운 정원 그림을 그렸다. 1920년대, 즉 말년에 그린 정원 그림들은 당시 독일에서 출발되었던 표현주의 그림을 매우 닮아 있다.

모네의 주정원은 그가 원했던 것처럼 수많은 작은 불꽃들이 일제히 타오르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수많은 꽃들이 동시에 피어나긴 했으나 아무 시스템도 없었고, 솔로와 중창과 합창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칠십 명의 솔로들이 시종일관 크레셴도로 연주하는 오페라 같아서 지금 보아도 매우 부담스럽다. 오감이 쉴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초원에는 내재한 시스템이 있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스템부터 이해해야 한다. 수많은 꽃이 동시다발적으로 핀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야생초원이 되지는 않는다. 비록 방법론에서는 실패했지만 모네의 의도는 시대를 성큼 앞서가고 있었다. 8)위의 글, pp. 134-135

  • 1909~1912: 백내장, 알리스 사망 등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함. 평생 처음 있는 일.
  • 1913: 정원 그림 다시 시작. 장미 아치 등
  • 1914: 수련, 아이리스 연작
  • 1920-1924 사이에 이상하게 어두운 그림들

Source: Wikiart.org/cluade-monet

지베르니 정원의 실물 사진들

100 장면 갤러리

각주   [ + ]

1. 고정희, “#18 클로드 모네에게 정원을 묻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해 본 조경사, 환경과 조경 2014.07, p. 132
2. 위의 글, p. 133
3. 위와 같음.
4. 고정희, “#19 마르셀 푸르스트의 예언”, 100 장면으로 재구성해 본 조경사, 환경과 조경 2014.07, p. 134
5. Karin Sagner, Monet in Giverny Prestel 1994, p.24
6. 고정희, 위의 글
7. 위의 글
8. 위의 글, pp. 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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