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독일 조경계 여장군 헤르타 함머바허 탄생일을 맞아

#16 장면 – <개인의 발견과 미래의 정원>에서는 헤르타 함머박허Herta Hammerbacher(1900-1985)에 대한 이야기를 자재하고 그의 작품사진만 한 장 실었다. 헤르타 함머박허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학위 논문을 썼기 때문에 내겐 각별한 인물이어서 더 자제했던 것일지도.


헤르타 함머바허 1957년

1900년 12월 2일에 태어나 1985년 5월 25일 사망한 헤르타 함머바허 교수(이하 헤르타)는 20세기 독일 조경계를 이끌어 간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여성들이 끼어들 수 없던 시절에 남자 동료들을 이리저리 제치고 1950년 베를린 공대 건축대학의 조경학과 정교수가 된다. 새로 탄생한 서독연방 최초의 여교수였다. 팔꿈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고 의지가 남달랐다는 뜻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력만 가지고는 모자란다. 굳은 의지와 강한 성격이 받쳐줘야 한다. 헤르타는 그 모든 것을 다 갖췄었다. 여로 모로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 여사를 연상시킨다. 큰 키에 꼿꼿한 몸가짐, 지적이고 당당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책임감이 무척 강했고 매사에 바르기가 조선 사대부들 저리가라였다. 나중엔 식구들이 <장군님>이라 불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맏딸로서 가장노릇을 했기 때문이다. 연로하신 어머니 잘 모시고 형편이 썩 좋지 않은 남동생 둘과 그 식솔들까지 다 챙겨주고 조카들을 데려다 공부시켰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무려 삼천 오백 건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구현했다. 장군님이라 불릴 만 했다.

그녀의 생애는 크게 세 시대로 나눠볼 수 있다. 1929년에서 1948년까지 포츠담 보르님에서 칼 푀르스터, 첫 남편 헤르만 마테른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시절. 초기에는 개인주택정원 설계가 쇄도하여 둘이서(칼 푀르스터는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깨너머로 훈수만 두고) 일주일에 평균 2-3개의 정원을 소화했다. 후일 젊은 조경가들을 여러 명 채용했으며 여기서 소위 말하는 보니머 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 시기에 트로이카가 구현한 프로젝트가 약 3천 건이었다. 독일 전역은 물론 동으로는 그단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북으로는 스웨덴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던 거의 무적의 시대였다.

신혼 시절의 헤르타와 헤르만

그러다 전쟁이 왔고 전쟁이 끝난 뒤 사회가 급변하여 모두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1950년, 헤르타는 몇 해 전부터 시간강사로 뛰던 베를린 공대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때부터는 국토재건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가 많았기 때문에 1969년 만 69세에 정년퇴직할 때까지 약 500건의 프로젝트를 구현했다. 그중에는 베를린 한자신도시, 카셀 정원박람회, 쾰른 정원박람회, 함부르크 알토나 신도시, 베를린 공대 캠퍼스, 아테네 식물원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수십 건이었다.

정년퇴직 후에는 몇몇 제자들과 함께 <환경계획Umweltplanung>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을 차렸다. 그렇다고 이때부터 환경생태계획을 한 것은 아니고 환경에 입각한 조경이라는 의미에서 그리 부른 것이다. 처음부터 자연과 조화된 조경, 건축, 도시설계를 주창했던 헤르타는 환경계획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1974년 조경학과가 환경조경학과로 변신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말하자면 헤르타의 생애와 경력 그 자체가 20세기 독일 조경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인 셈이다. 건축가, 도시설계가 국토부 공무원들 앞에서 특강을 하면서 “경관이 먼저고 건축은 그 다음이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와 봐라. 경관과 조화되는 건축을 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칼, 헤르만과 헤르타 세 사람은 성향이 매우 달랐다. 그래서 서로 최적으로 보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칼은 정원의 새로운 소재(숙근초)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며 아이디어도 함께 제공했고 헤르만은 샘솟는 창의력의 소유자로 <큰 선 그리기> 담당이었다. 헤르타는 식물에 대한 조예가 깊어 식물디자인을 도맡는 한편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전문잡지에 작품을 소개하는 집필 담당이기도 했다.
헤르만과 헤르타 부부는 기본적으로 설계 방향이 유사했지만 디자인할 때 헤르만은 지형높이기를 선호했고 헤르타는 그와 반대로 지형을 낮춰 완만한 분지를 만들곤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각각 <마운딩 헤르만>, <분지 헤르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시 헤르타가 쓴 글은 지금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작품을 소개할 때마다 과학적,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특기였으며 이런 방식으로 설계이론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원칙에 따라 설계해야 할까

휘적휘적 걷는 걸음걸이의 리듬에 맞게 설계된 길. 헤르타 함머바허 1953

그중에서 1953년에 발표한 <길>에 대한 글은 가히 압권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말하면 길을 제대로 설계하기 위해 십 수 년을 고심했었다. S-자형 곡선 길도 설계해 보고, 똑바른 길도 설계해 보았지만 다 석연치 않았다. 그녀를 괴롭힌 생각은 <어떤 원칙에 의해 설계하는 것이 옳은가>였다. 정원에서 길의 의미가 매우 큰 점을 생각할 때, – 길이 있어야 정원을 체험할 수 있으므로 -, 뭔가 불변의 원칙이 있어줘야 했다. 여러 차례 메모를 하고 1948에는 강의노트에 매우 상세하게 길의 설계원칙을 정리해 두었다가 1953년에야 발표했다.  5년 동안 다시 신중한 검증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운전을 즐겼던 헤르타는 – 오픈카를 타고 머플러를 휘날리며 현장에 나타나곤 했다고 –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운전을 하다보면 교통의 흐름 속에서 본능적으로 저항이 가장 적고, 힘을 가장 아끼는 쪽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걷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그리고 이런 글을 썼다.

“길은 우리가 매일이다시피 설계하는 것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설계하고 기계적으로 시공한다. 길이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

사람은 본능적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까지 최단거리로 가고자 한다. 산책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산책할 때는 바삐 걷지 않고 <휘적휘적> 걷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때 걸음걸이와 양팔의 움직임이 일정한 리듬을 보인다. 길을 설계할 때 바로 이 리듬을 따라주어야 한다. 원칙은 최단거리지만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의 지그재그의 움직임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첫째 원칙이다. 둘째로는 정원의 지형과 여러 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 오르막길인지, 내리막길인지 중간에 계단이 있는지 등등. 공원길이 다르고 개인정원의 길이 달라야 한다. 같은 공원이나 정원이라도 어느 곳에 배치되는지에 따라 또 달라져야 한다. 그러므로 설계할 때 면밀히 살펴 돌 하나하나 정확하게 위치를 잡아서 그려주어야 시공하는 사람들이 이를 제대로 옮길 수 있다. 셋째 원칙은 소재다. 어떤 소재를 쓰는 가에 따라 배치를 달리하여 소재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 또한 정원의 식물과 돌이 서로 맞물려야 아름답다.

이런 의미에서 길은 정원을 이루는 무기적인 요소가 아니라 식물과 화합하고 대화하는 유기적 요소인 것이다.

여기까지 원칙을 설명하고 나서 각 소재에 따라 예를 들어 샌드스톤인가 화강석인가,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었는가 아니면 거친돌인가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는 것이 좋은지 상세히 설명했다.

매사 이런 식이었다.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원칙을 세웠으며, 한 번 세운 원칙은 끝까지 지켜냈다. 예를 들어 헤르타는 이성이 감성을 지배해야 한다고 철저히 믿었었다. 감성은 기복이 있고 흔들릴 수 있으므로 신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성은 합리적이며 뚜렷한 도덕적 원칙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므로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이점에 헤르만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둘 외에 제3의 어떤 것, 영혼이라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이혼 직전의 <가족사진>. 절친했던 친구 한스 샤룬이 찍은 사진. 무의식적으로 가족관계를 캐치한 듯하다. 헤르만이 딸과 정원에서 놀고 있고 거실의 헤르타는 가족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둘이 결혼할 때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갈 것을 약속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사흘 만에 헤르타는 당연하다는 듯 다시 일을 시작했고 이에 깜짝 놀란 남편은 아이가 클 때까지 일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헤르타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보다 남편이 말을 바꾸는 것에 더 실망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살기로 하지 않았어? 퀴리부부처럼. 그래. 그땐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이제 아이도 태어났으니 당신이 집에 있으면 안 될까? 물론 안 되지. 왜 나만 일을 그만둬야 하는 지 그걸 한 번 이성적으로 설명해 봐. 이랬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어서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섰고 결국 이혼에 이르렀다. 헤르만은 이혼 직후 베아테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사진작가를 만나 재혼했다. 베아테가 두 사람의 딸을 기른다는 조건으로. 베아테는 평생 헤르만에게 맞춰주며 살았다. 사진작가로 일하는 한편 헤르만과 헤르타의 딸을 기르고 헤르만의 비서노릇까지 했다. 헤르타는 베아테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넌 왜 그렇게 사니”.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칠 년 뒤에 헤르타도 재혼을 했다. 두 번째 남편은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경제학 박사였으나 음악과 예술을 좋아하고 파티를 즐겼다. 결혼 직전, 헤르타는 <혼인각서>를 들이밀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사는 건 불가능해 보이니 <각자 일하고 각자 살자>가 요지였다. 즉, 주말부부로 살아가자고 했다. 남편에겐 청천벽력이었지만 일단 서명을 하고 살면서 서서히 설득해 보리라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헤르타는 남편이 합치자고 요구해 올 때마다 혼인각서를 꺼내 보이며 당신이 여기 서명하지 않았느냐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결국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주말부부로 살았다. 약속은 지켰으나 두 사람 다 행복하진 않았다. 때로는 생일 선물도 우편으로 주고받았고, “당신이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기사를 내가 왜 신문에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남편으로서 감히 축하해도 되느냐” 이런 편지도 오고갔다. 헤르타는 과연 행복을 바랬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한 번도 불행하다고 투덜댔던 적이 없다. 오로지 일을 할 수 있으면 만족했다. 일로 충만하여 만족했던 삶이었고 말년에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정원은 소우주

헤르타의 원칙주의는 물론 프로젝트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는 오랫동안 정원의 원형을 찾았고 결국 <숲속의 빈터>에서 발견했다. 처음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숲을 벌목하고 빈터를 만들어 밭을 일구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장 원초적인 것에서 정원의 원형을 찾은 것 역시 그녀다웠다. 이를 정원설계에 대입해 보면: 사방을 수목스크린으로 둘러 숲을 만들고 안쪽의 잔디밭, 즉 숲 속의 빈터는 아주 완만한 분지 형으로 보일 듯 말 듯 우묵하게 만들었다. 잔디밭과 숲 사이로 길(위의 원칙대로 설계된)을 한 바퀴 돌리고 길 주변에는 야생 숙근초를 층층이 심어 숲의 하부구조를 재현했다. 길의 중간쯤에 새들이 날아 와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작은 샘물을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옹달샘을 마시기 위해 숲속 빈터를 찾아드는 새까지 재현한 것이다. 집 앞에는 테라스를 높여 잡아 퇴근 후 이 테라스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연출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테라스 흔들의자에 앉아 깊은 명상에 잠기며 우주와 만나게 되는 곳>이 그녀의 정원개념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설계한 정원을 <소우주>라고 불렀다.

개인정원뿐 아니라 학교정원, 종합병원이나 요양원의 외부 공간, 회사 정원 등 사람들이 매일이용하는 공간은 어김없이 소우주를 재현했다. 그녀에게 정원 설계는 설계자 개인의 예술적 창의력을 선보이는 무대가 아니었다. <사명>이었다. 너무 멀리 떠나와 기억도 아득한 자연, 즉 소우주를 이용자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설계자의 사명이라 했다. 그리고 소우주의 재현은 단 하나의 설계언어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창의적 본능을 크게 눌러야 했으나 원칙은 원칙이었다.

정원은 신과 대화하는 소우주. 베를린 퓌클러가 개인정원. 현재 스웨덴 대사 관저.

 

헤르타 대표작 중 하나. 베를린 퓌클러가 개인정원. 길 대신 물길을 냈다.

 

식물디자인의 선구자

그 대신 정원박람회 설계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창작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정원박람회가 원래 그런 곳이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936년 드레스덴 정원박람회에 출품한 <파란 기적의 정원>이 좋은 사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정원으로 형상화했다고 한다. 푀르스터가 육종한 키 큰 파란 제비고깔 꽃과 그라스를 <상대성원리에 따라> 공간과 시간으로 풀어놓았다는데 결국 아무도 이해하진 못했지만 당찬 시도였다. 과학적 원리와 디자인이 일치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을 것이다.

1939년 슈투트가르트 정원박람회 현상공모에 전남편 헤르만이 일등을 차지하고 헤르타는 2등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식재디자인에서만큼은 헤르타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므로 헤르만의 초청을 받아 전 박람회 장의 식재를 맡았다. 이때 그동안 연구한 새로운 식재디자인 기법을 마음껏 펼쳐 보여 전에 볼 수 없던 장면들을 연출해 보였다. 명실 공히 식물디자인의 어머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953년 카셀 연방정원박람회, 1957년 쾰른 연방정원박람회에서 연달아 일등에 당선되며 드디어 종합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전체 콘셉트와 식재디자인은 물론이고 시설물까지 직접 디자인하며 기염을 토했다. 헤르타의 전성기였다. 이때 쾰른의 라인 강변을 따라 아이리스와 그라스로 이루어진 띠를 무려 2킬로미터 연장시킨 것은 그녀의 스케일을 보여줄 뿐 아니라 후세의 피에트 아우돌프의 콘셉트를 50년 앞당긴 거였다.

문제는 헤르타가 건축학과 교수였기 때문에 정작 조경계에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헤르만 라인>은 있는데 <헤르타 라인>이 없고 이로 인해 그녀의 실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쾰른 정원박람회 1957. 라인강변을 따라 길게 배치된 아이리스와 그라스 띠. 식물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

우울한 최후

1970년대 후반 조경계에 나치스추적자들이 나타났다. 나치스 정권이 무너지고 두 세대가 지났으니 이제 진실을 밝힐 때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다음 세대는 우리 부모님, 우리 선배님, 우리 교수님은 연루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고 싶어 눈을 감고 지냈다. 그 다음 세대는 달랐다. 이제 눈을 똑바로 뜨고 우리의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고 여겼다. 역사 극복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들은 나치스 시대에 활동했던 조경가들에게 접근했다. 해르타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땐 이미 헤르만을 위시하여 대부분 세상을 떠난 뒤였고 몇 남지 않은 동료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오로지 여장군 헤르타만이 홀로서서 화살을 받아냈다. 1977년 후배 조경가가 <가르텐+란트샤프트> 잡지에 조경가들도 연루되었었다는 요지의 기사를 발표했다. 바로 그 다음 호에 헤르타의 대답이 실렸다. 우리는 모두 평화주의자였으며 그 시절 내면으로 망명을 떠나 살았다고 대답했다. 그 시대가 지나간 것이 너무 다행인데 왜 자꾸만 과거를 끄집어내느냐고도 했다. 그러나 후배들의 질문 공세는 198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해에 젊은 여류 건축가 한 명이 헤르타의 집으로 찾아 왔다. 명분은 헤르타의 생과 작품에 대한 인터뷰였다. 사흘 동안 마라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대화가 자연스레 나치스 시대에 이르렀고 그 순간 헤르타는 일시에 무너졌다. 여장군이 방패와 무기를 거두고 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진실을 말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그 외에 어떤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비겁하여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모래밭에 머리를 박고 이 끔찍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이듬해 5월 헤르타는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져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한포기 풀이고 한그루의 나무며 우주에 떠도는 별 일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베를린 반제호수. 슈프링거 출판사 사장 저택의 정원. 공원에 가까운 규모. 1967년.

 

헤르타의 마지막 작품. 아테네 대학 디오메데스 식물원. 헤르타의 명성을 들은 아테네 대학의 초청으로 설계.

2018년 12월 2일
고 정 희